하루에 십 몇 건씩, 어떤 때는 스물 몇 건씩 협의이혼 의사 확인을 하다 보니 이제 서로 등 돌리고 앉아서 아무 감정 없이 나를 쳐다보는 부부들을 대하는 것도 전혀 낯설지 않다. 판사로서 이혼 사건을 담당하는 것이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니다. 한 가정이 깨지는 모습을 보는 것도 그렇지만 당사자들이 뿜어내는 온갖 독설과 분노들이 보는 이를 힘들고 지치게 만든다. 그러나 나를 가장 힘들고 지치게 하는 것은 그렇게 싸우는 부모들 뒤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어린 자녀들이다. 부모의 이혼이 자녀들에게는 암 선고를 받는 것보다 더 큰 충격이라고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이혼 과정에 있어서 대부분 자녀들에게는 아무런 선택권이 없을뿐더러 많은 부부들이 이혼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자녀는 누가 양육할 것인지, 면접교섭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자녀들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육비’는 부모로서의 당연한 의무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이혼한 부모가 자녀에 대해 갖는 소중한 권리이기도 하다. 이혼으로 엄마나 아빠의 빈자리가 생긴 자녀에게 경제적으로나마 빈자리가 생기지 않도록 배려해 줄 수 있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자녀에게 남아 있는 아빠·엄마의 자리가 사라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마지막 사랑이다.
‘면접교섭권’도 부모 중 자녀를 양육하지 않는 일방의 권리이기도 하지만 자녀의 권리이기도 하다. 면접교섭은 이혼한 아픔을 딛고 살아가야 하는 자녀에게 있어서는 부모 일방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수단임과 동시에 자녀의 복리와 올바른 성장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 과정에서 쌓인 상대방에 대한 나쁜 시선과 감정 때문에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거나 상대방의 면접교섭을 방해하는 부부들을 자주 본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혼 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이혼한 후에도 엄마, 아빠가 상대방에 대한 감정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싸우는 동안 자녀들은 참혹하게 병들어 간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혼 자체를 반대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건강한 이혼’을 선택하는 것이 끊임없이 전쟁 상태에 있는 결혼 생활을 지속하는 것보다 훨씬 현명한 선택이 될 수 있다. 엄마, 아빠가 늘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때로는 엄마, 아빠의 이혼보다 더 큰 고통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혼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나 혼자서, 혹은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과 함께 이전과는 다른 모습의 가정을 가꾸어 가는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혼을 하되 보다 평온하고 아름답게 헤어지는 법을 알아야만 상처 없이 새로운 모습의 가정을 가꾸어 갈 수 있다. 이혼과정에서 상처나 갈등을 줄이면서 건강하게 헤어지는 것이 이혼의 후유증을 줄이고, 자녀에게는 서로 각자 그리고 때로는 양육의 동역자로서 함께 바로 설 수 있는 길이다.
비행청소년들에 대한 재판을 하다 보면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애정과 관심이 결핍된 아이들, 그래서 집을 나와 나의 상처와 아픔을 이해해 줄 수 있는 또래들을 찾게 되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비행을 저지르게 된다. 재판을 받고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는 비행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다짐해 보지만, 집으로 돌아가면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 엄마, 아빠의 빈자리는 여전하다. 그 아이가 또다시 범행을 저지르고 법원에 오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난 그것이 부모가 건강한 이혼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건강한 이혼을 하여야 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이혼의 악순환을 막기 위해서다. 이혼한 가정의 자녀는 정상적인 가정의 자녀보다 이혼율이 3배 정도 높다고 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자녀들이 결정하지 않았다. 이혼도 자녀들이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자녀들은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그 고통을 줄일 수 있는 길은 ‘건강한 이혼’ 밖에 없다. 그리고 ‘건강한 이혼’을 하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상담’과 ‘부모교육’이다. 이혼하면서 부모교육이나 상담조차 받지 않는다면, 그래서 건강한 이혼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다면 부모로서의 최소한의 자격도 갖추지 못한 것이다. 내가 요즘 건강한 이혼을 생각하는 이유다.
<대전지법 가정지원 장동혁 판사>
‘양육비’는 부모로서의 당연한 의무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이혼한 부모가 자녀에 대해 갖는 소중한 권리이기도 하다. 이혼으로 엄마나 아빠의 빈자리가 생긴 자녀에게 경제적으로나마 빈자리가 생기지 않도록 배려해 줄 수 있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자녀에게 남아 있는 아빠·엄마의 자리가 사라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마지막 사랑이다.
‘면접교섭권’도 부모 중 자녀를 양육하지 않는 일방의 권리이기도 하지만 자녀의 권리이기도 하다. 면접교섭은 이혼한 아픔을 딛고 살아가야 하는 자녀에게 있어서는 부모 일방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수단임과 동시에 자녀의 복리와 올바른 성장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 과정에서 쌓인 상대방에 대한 나쁜 시선과 감정 때문에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거나 상대방의 면접교섭을 방해하는 부부들을 자주 본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혼 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이혼한 후에도 엄마, 아빠가 상대방에 대한 감정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싸우는 동안 자녀들은 참혹하게 병들어 간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혼 자체를 반대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건강한 이혼’을 선택하는 것이 끊임없이 전쟁 상태에 있는 결혼 생활을 지속하는 것보다 훨씬 현명한 선택이 될 수 있다. 엄마, 아빠가 늘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때로는 엄마, 아빠의 이혼보다 더 큰 고통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혼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나 혼자서, 혹은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과 함께 이전과는 다른 모습의 가정을 가꾸어 가는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혼을 하되 보다 평온하고 아름답게 헤어지는 법을 알아야만 상처 없이 새로운 모습의 가정을 가꾸어 갈 수 있다. 이혼과정에서 상처나 갈등을 줄이면서 건강하게 헤어지는 것이 이혼의 후유증을 줄이고, 자녀에게는 서로 각자 그리고 때로는 양육의 동역자로서 함께 바로 설 수 있는 길이다.
비행청소년들에 대한 재판을 하다 보면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애정과 관심이 결핍된 아이들, 그래서 집을 나와 나의 상처와 아픔을 이해해 줄 수 있는 또래들을 찾게 되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비행을 저지르게 된다. 재판을 받고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는 비행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다짐해 보지만, 집으로 돌아가면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 엄마, 아빠의 빈자리는 여전하다. 그 아이가 또다시 범행을 저지르고 법원에 오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난 그것이 부모가 건강한 이혼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건강한 이혼을 하여야 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이혼의 악순환을 막기 위해서다. 이혼한 가정의 자녀는 정상적인 가정의 자녀보다 이혼율이 3배 정도 높다고 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자녀들이 결정하지 않았다. 이혼도 자녀들이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자녀들은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그 고통을 줄일 수 있는 길은 ‘건강한 이혼’ 밖에 없다. 그리고 ‘건강한 이혼’을 하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상담’과 ‘부모교육’이다. 이혼하면서 부모교육이나 상담조차 받지 않는다면, 그래서 건강한 이혼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다면 부모로서의 최소한의 자격도 갖추지 못한 것이다. 내가 요즘 건강한 이혼을 생각하는 이유다.
<대전지법 가정지원 장동혁 판사>